출판사 제공 이토록 순하고 맑은 세계, 조각나고 부서지고 무너져버린 지금 우리에게 “함부로 무엇을 알고 있다고 단정하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서서 고통을 그저 바라볼 줄 아는 이주란의 소설을 나는 사랑한다”(소설가 박상영), “극적인 장면 없이 고루 팽팽하고, 대단한 플롯 없이 완벽하며, 시 없이 시로 가득하고, 청승 없이 슬픔의 끝점을 보여준다”(시인 박연준). 2012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소리 높여 주장하기보다 온화하게 스며드는 특유의 서정으로 독보적 지지를 얻어온 이주란. 그의 소설들은 ‘담담한 듯하지만 위트가 반짝이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사람과 사람,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들여다보는 사려 깊은 소설가의 세 번째 소설집 《별일은 없고요?》가 출간되었다. “넌 최선을 다해 잘 살아왔어” 이주란의 소설 세계는 촘촘한 일상과 미세한 감정으로 일군 박물관과도 같다. 그 박물관에 들어서면 너무나 사소해서 그대로 지나칠 법한 것들이 어느새 절박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변모한다. 이를테면 “어두운 밤 산책길엔 어디선가 풍겨오는 은은한 라일락 향기를 맡고 주말이면 준경 씨네 밭에서 쑥을 캐고 쑥국 한 그릇과 오이지를 두고 소박한 밥 한 끼를 먹는 일”(118쪽)이 단박에 일으키는 정서 같은 것. 미안함과 고마움,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믿음직스러움과 따스함 등 ‘정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독자들은 초대된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당분간은 좀 쉬어. <어른> 속 ‘나’는 남은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의 장례 후 고인의 짐을 정리하고자 시골집에 머문다. 몇 해 전 우연히 알게 된 ‘아줌마’는 청계천 미싱사로 오래 일해온 정직하고 호방한 인물로 내 곁에 남아 힘이 되어준다. 계약직 사원인 나는 4년째 4개월마다 계약을 이어왔었다. 그때마다 심장이 뛰었고 그래서 더 열정을 쏟아붓고 “초조하고 불안해서 그만하지 않고 그럴수록 최선을 다했으나” 회사로부터는 당연히 보답받지 못했던 터다. 삭막한 서울살이를 그나마 아줌마 덕분에 견딜 수 있었던 것. 할머니의 집을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고 아줌마와 함께 울고 웃으며 못 다한 감정을 풀어낸다. “마음 놓고 울라는 거야”(104쪽). 아줌마는 소맥을 말아주며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내 인생을 긍정해준 단 한 명의 어른. “아줌마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지금 나눠 받고 있다는 무자비한 따뜻함”(114쪽)을 느끼며 아줌마가 알려준 방식으로 나는 달린다. 힘이 들면 중간에 멈췄다가 다시 뛰는 것, 너무 힘들 땐 그러는 게 좋다는 것. 이야기는 끝나도 삶은 계속되듯, 떠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희망 쪽을 향해 있다. 이 무 자비한 세상에 맞서 “무자비한 따뜻함”(「어른」)을 전하는 그의 소설에 또다시 큰 신세를 입었다._오은(시인) “떠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희망 쪽을 향해 있다” 마치 한 편의 연작 소설처럼 각 단편은 다양한 상처와 상실의 풍경을 그려낸다. <사람들은>은 엄마의 죽음을 겪은 ‘나’를, 역시나 엄마를 잃은 뒤 찾아와 신세를 지고 떠난 전 직장 동료와의 며칠을 담았다. <서울의 저녁>은 객지에서 20대를 함께한 친구의 기일에 모인 이틀을 이야기한다. <이 세상 사람>은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인 ‘그’에 관한 서류에 답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20년간 수없는 이사를 하고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고 살고 있지만, 지옥 같은 기억이 점령한 ‘나’에게 일상의 평화는 간절하다. <위해>는 불우한 환경 탓에 어려서부터 뭔가를 아예 꿈꾸지 않는 법을 익혀온, 그게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에 길들여졌던 내가 어느 날 어쩌면 어릴 적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이웃집 소녀와 함께한 하루에 관한 이야기다. 현경은 잠깐 재한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현경아. 잘. 잘 살아야 돼. 재한이 다시 한번 말했다. 응. 잘 살게. 현경은 그렇게 말하고 ‘예약’ 등이 깜빡이는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_<파주에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