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테넷」, 「덩케르크」, 「인터스텔라」, 「메멘토」……. 스크린 너머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작품들을 선보여 온 거장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신작 「오펜하이머(Oppenheimer)」가 올여름 개봉 예정이다. 북미 개봉(2023년 7월 21일)을 앞두고 6월 1일 공개된 비하인드더신 영상에서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야기”라고 표현한 「오펜하이머」는 1억 달러라는 제작비나 주연 킬리언 머피, 조연 「아이언 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의 화려한 출연진, 아이맥스 포맷 전용 영화, CGI에 의존하지 않은 핵 폭발 장면 촬영 등의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다. 첫 번째 트레일러 영상이 공개된 직후 나온 2022년 12월 18일자 《버라이어티》 기사에 따르면 영화는 퓰리처 상 수상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말 그대로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 사건, 인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로 되살아온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우리는 1945년 이래로 우리 마음속에 폭탄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무기였고, 다음에는 외교 수단이었다. 이제 그것은 우리의 경제이다. 그와 같이 강력한 물건이 40년이나 지난 후에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거대한 골렘이 바로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 폭탄의 논리, 그것에 대한 믿음, 그것이 만들어 낸 비전이 바로 폭탄의 문화인 것이다.―E. L. 닥터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국내 처음 소개된 2010년은 제17차 아세안 지역 안보 포럼(ARF) 각료 회의에서 북핵 관련 6자 회담의 재개를 촉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북한 핵 시설을 둘러싸고 고조되는 국제 사회의 긴장 상황은 핵무기가 처음 만들어진 지난 세기에 이미 예측된 바 있다. 그리고 그 첨예한 대립이 현재 진행형인 우리나라에서 주목해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로버트 오펜하이머다. 제2차 세계 대전 승리를 향한 경쟁 속에서 태어난 핵무기는 이미 탄생 직후 엄청난 파괴력과 남용 가능성으로 인해 말 그대로 폭탄이 되어 왔다. 그리고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지휘자이자 원자 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일생에 있어서도 극적인 순간들을 안겨 주었다. 저널리스트인 카이 버드와 영문학과 미국 역사학 교수인 마틴 셔윈 두 사람의 저자가 25년 동안 답사와 인터뷰, FBI 문서 열람 등 자료 수집을 거쳐 쓴 이 책은 2005년 처음 출간되자마자 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 전기 부문(The National Book Critics Circle(NBCC) Award for Biography)을 수상하고 2006년에는 퓰리처 상 전기·자서전 부문(Pulitzer Prize for Biography or Autobiography)을 수상한 바 있다. 과학자와 그가 생산한 지식의 책임을 묻다! 지식은 그 자체로 문명의 기반이다. 하지만 지식의 폭을 넓히는 것은, 인간 생활의 조건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게 보다 많은 책임감을 지운다.―닐스 보어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터널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터널 반대편이 계속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지, 아니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오펜하이머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의 불을 훔쳐내 인간에게 가져다준 대가로 매일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받게 된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이후 《사이언티픽 먼슬리》에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들은 다시 한번 올림푸스 산으로 돌격해 인간을 위해 제우스의 벼락을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썼듯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연일 언론의 찬사와 더불어 대중의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맨해튼 계획의 총지휘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점차 인류를 향한 경고의 목소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냉전의 시대 몰아친 매카시 광풍에 휩쓸려 일종의 본보기로서 추락하고 만다. 오펜하이머의 이상주의가 그를 곤경에 빠지게 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가 받은 훌륭한 윤리학 교육의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느꼈다. 펠릭스 애들러와 존 러브조이 엘리엇의 학생이라면 아무리 현명하지 못한 선택일지라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이었다.―데이지 뉴먼(에티컬 컬처 스쿨 동급생)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은 세심한 보호와 천재성에 대한 아낌없는 독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독일 출신의 이민자 1, 2세대인 양친을 두고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오펜하이머가 다녔던 뉴욕 에티컬 컬처 스쿨은 창립자 애들러의 가르침대로 세상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게 하는 학교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내성적인 천재 소년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곳에서 평생 스승인 교사 허버트 스미스와 더불어 점차 더 넓은 세계와 만나게 된다. 또한 그가 평생 사랑한 뉴멕시코 주로 처음 여행을 떠난 시기이기도 하다. 오펜하이머 가족이 자주 머물던 페로 칼리엔테 목장은 평생 그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1922년에 처음 방문한 인근 로스앨러모스 목장 학교 부지는 훗날 맨해튼 프로젝트의 산실이 되기도 한다. 현대 물리학 혁명의 현장으로 나는 오펜하이머를 만나자마자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막스 보른 케임브리지에서 힘겨운 1년을 보내고 난 오펜하이머는 비로소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괴팅겐 대학교 이론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막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가 최근의 논문에서 제기한 이론적 문제를 두고 고심하는 오펜하이머에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보른의 초청을 받고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제임스 프랭크, 오토 한, 조지 웰렌베크, 폴 디랙, 요한 폰 노이만 등과 교류했다.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보른은 1924년에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이라는 말을 만들었고 양자의 세계에서 상호 작용의 결과는 확률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평화주의자이자 유태인이었던 보른은 오펜하이머와 같은 민감한 젊은 학생에게 이상적인 스승이었다. 양자 역학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합리한 방식으로 자연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험 결과와는 잘 맞아 떨어지지요.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연은 원래 불합리한 것입니다.―리처드 파인만 나치스의 대두와 유태인 교수의 정치 편력 정치가 진실,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로버트 오펜하이머 1920년대 후반부터 활발한 학문적 활동을 펼치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쳐왔다. 심미안을 추구하던 자유인 오펜하이머도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오펜하이머는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해 4월 독일에서는 유태계 독일인 교수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대학에서 쫓겨났다. 1934년 봄, 오펜하이머는 독일인 물리학자들이 나치스 독일에서 이민해 나오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한 광고 전단지를 보고 이후 2년 동안 연봉의 3퍼센트(1년에 약 100달러 정도)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오펜하이머는 1954년 심문관들에게 “1936년 무렵에 나의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나는 독일에서 유태인들이 겪는 일에 대해 지속적이고 사무치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친척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공황이 나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적절하지 못한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아예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건들이 인간의 삶에 이토록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로버트 오펜하이머 1936년은 오펜하이머가 진 태트록을 처음 만난 해이기도 하다. 심리학도로서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되는 진은 오펜하이머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오펜하이머를 이론에서 행동으로 움직이게 한 것은 진의 열정적인 성격이었다. 진의 활동가적 기질과 사회의식이 오펜하이머가 에티컬 컬처 스쿨 시절 토의했던 사회적 책무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공산당원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당보다도 대의였으며 1936년 가을 무렵 그녀를 사로잡은 가장 중요한 대의는 곤경에 빠진 스페인 공화국이었다. 사상 초유의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 스페인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세상에는 다른 더 급박한 위기가 닥치고 있다.―로버트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의 이름은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원자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극비 군사 연구소를 이끌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1939년 9월 1일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이때 설치된 우라늄 위원회는 2년 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새로운 무기에 대한 보고서를 받고 나서 활동에 박차가 가해지며 백악관 직속의 위원회가 새로 구성되었다. 이곳 로스앨러모스에서 나는 아테네의, 플라톤의, 이상적 공화국의 정신을 발견했다.―제임스 터크 뉴멕시코의 사막 고원 지대에 거대한 연구 기지가 세워질 참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종종 물리학과 뉴멕시코 사막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동시에 추구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해 왔는데 드디어 절묘한 기회가 왔다.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 시카고, 버클리 등지에서 고속 중성자 핵분열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여러 그룹들이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들을 한 곳으로 모아 공동 연구를 하도록 강조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 퍼진 맨해튼 프로젝트 소속 기관들의 연구 개발 활동을 통합하여 사용 가능한 핵무기를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로스앨러모스에 세워진 비밀 연구소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포함한 민간인 4000명과 군인 2000명이 거주하는 하나의 마을이었다. 나 역시 이번 프로젝트가 ‘물리학 300년의 정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네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네. 나에게 이것은 전쟁 중에 상당히 중요한 무기를 만드는 일이야. 나치스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로버트 오펜하이머 열린 세계를 향하여 우리는 이미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쾌거를 손에 넣은 것이 확실하다. 가까운 미래에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우리가 빠른 시일 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다.―닐스 보어 보어는 맨해튼 프로젝트와 관련해 독일과 비국을 누비며 오펜하이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보어에게 과학 탐구의 공동체적 문화는 진보와 합리성을 만들어 내는 것과 동시에 평화도 일구어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후에 세계 각국은 어떤 잠재적 적성국이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국제 감시단이 각국 군사 및 산업 시설에서 하는 일과 새로운 과학 발견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갖는 ‘열린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주권이 없는 지역이 존재할 것이고, 주권은 국제 연합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방식의 전쟁이 종식될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그 약속이다. 그것이 내가 이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로버트 윌슨 슈퍼 폭탄에 맞선 한 사람 첫 번째 섬광의 빛이 땅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눈꺼풀을 투과했다. 내가 처음으로 올려다보았을 때 나는 불덩어리를 보았고, 그 바로 직후에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구름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밝고 매우 자주색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쪽으로 흘러와 우리를 집어삼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프랭크 오펜하이머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도 조급해졌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을 했고, 그로부터 8일 후 독일은 항복했다. 세그레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첫마디는 “우리가 너무 늦었군.”이었다.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나치스 굴복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세그레는 그의 회고록에 “이제 폭탄이 나치스에 사용될 수 없게 되자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라고 썼다. 이제 나는 죽음이, 세계의 파괴자가 된다.―바가바드기타 중에서 전쟁 직후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의 존재가 미국에, 나아가 전 세계에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핵 독점은 유지될 수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다른 과학자들과 같이, 그는 소련이 3~5년 안에 미국의 핵 독점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핵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의 안전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위험한 것이었다. 우리는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고 이는 세상을 한순간에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을 만듦으로써 우리는 과연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로버트 오펜하이머 현대판 갈릴레오, 열린 마음의 주인 1950년대의 암흑기에 논쟁의 중심에 있다는 이유로 그가 괴로움을 겪을 때, 나는 그에게 마음만 먹으면 외국의 대학에서 그를 환영할 테니 외국에 나가서 살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제길,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한단 말야.”―조지 프로스트 케넌 오펜하이머는 매카시 반공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원자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노력에 앞장섰지만, 그가 동포들에게 위험성을 경고하려고 했을 때, 즉 미국이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미국 정부는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그를 재판정에 세우고 말았다. 프리먼 다이슨이 언급한 ‘파우스트의 거래’에서와 같이 오펜하이머는 거래의 조건을 재협상하려고 시도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잘려져 나가야만 했다. 역사가 바튼 번스타인은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매카시 없는 매카시즘의 승리였다.”라고 썼다. 1954년 보안 청문회 이후, 공인으로서의 오펜하이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고, 인용했으며, 사진을 찍고, 조언을 구했으며, 찬사를 퍼부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영웅의 원형(源型)으로, 과학과 지성의 영웅으로, 새로운 원자력 시대를 연 장본인이자 살아 있는 상징으로 신격화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영광은 사라졌고 그 역시 사라져 버렸다.―로버트 코플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이사회 의장인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주도 하에 다분히 악의적인 고발과 불법 도청으로 그의 개인적인 연애사까지 들먹이며 수모를 안겨 준 보안 청문회가 끝났다. 스트라우스는 개인적 복수심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오펜하이머를 소장직에서 유임시키는 투표를 몇 달 미뤘다. 그동안 고등 연구소의 교수들은 오펜하이머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작성해 서명을 받을 시간을 벌었으며 연구소의 종신 교수들은 모두 서명했다. 오펜하이머는 중절모와 더불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버린 애연 습관으로 얻은 후두암으로 1967년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까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냉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핵 대결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 있다. 오펜하이머는 핵 확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1946년에 제안했던 핵무기 국제 통제 계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펜하이머의 삶과 고민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카이 버드, 마틴 셔윈, 한국어판 서문에서 오펜하이머의 고난은 그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물리학자답게 스스로 세운 명징한 논리에 따라 사고하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왔다.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런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이번 영화가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고만 알려진 오펜하이머의 고민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최형섭, 특별판 옮긴이 후기에서 |